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전쟁 (문단 편집) === 제3차 대구 전쟁 === ||[[파일:external/www.lhg.is/200milur-sm.jpg|width=100%]]|| || 아이슬란드 어업전관수역 - 200해리 || 3차례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이다. 1973년 개최된 제 3차 [[UN]]해상법 회의에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34개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로 늘리자는 제소를 했는데 아이슬란드도 여기에 동참하기로 한다. 74년에 들어 아이슬란드 수역에서 대형 대구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73년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과 이에 따른 [[오일 쇼크]]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아이슬란드 경제도 파탄났다. 당시 아이슬란드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50퍼센트를 넘었고, 무역적자는 1억 5천만 달러를 돌파했다. 이런 사태가 되자 결국 아이슬란드 정부는 75년 10월 15일 어업전관수역을 200해리로 확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 당연하게도 영국이 반발해 3차 대구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서독은 아이슬란드 수역에 있어서 연간 조획량을 6만 톤 이하로 제한한다는 방식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대구에 목숨 걸었지만, 독일인들은 [[볼락]]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연간 조획량 6만 톤 중 대구는 5천 톤만 잡고 나머지는 주로 볼락을 잡는다고 해서 아이슬란드와 쉽게 타결할 수 있었다. 이 때 서독은 영국에게 '우리처럼 볼락을 잡는 게 어때?' 하고 제안했지만 영국은 거절한다.] 12월 11일 아이슬란드 경비정인 토르가 영국 배인 스타 아쿠아리우스, 로이드먼, 스타 폴라리스를 발견한다. 토르는 영국배에 대해 떠나라고 했지만, 오히려 스타 아쿠아리우스와 로이드먼은 토르에 [[충각|몸통 박치기]]를 걸어와 손상을 입혔다. 이에 토르는 57mm 포를 스타 아쿠아리우스에 응사해 명중시켜 버렸다. 결국 영국 배들이 물러났고 토르는 거의 침몰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무사히 항구로 돌아간다. 76년 1월 이번에는 영국 호위함인 HMS 안드로메다가 토르에 대해 [[충각|몸통 박치기]]를 시도해 토르의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만다. 안드로메다의 선체는 살짝 패인 정도였다. 결국 76년 1월 13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 군함이 아이슬란드 해협에서 나가지 않으면 15일 국교를 단절한다고 발표하고 '''이번에도 NATO 탈퇴를 시사했다.'''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애쉬빌급]] [[고속정]]을 몇 척 빌리거나 구입하려고 제안했는데 당시 미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가 이를 거절하자, '''이번에는 [[소련]]의 [[미르카급 호위함]]을 구입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를 본 [[NATO]]는 깜짝 놀라 서둘러 또다시 중재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냉전]] 시기라 이대로 두면 NATO 동맹국의 구역 사이 북대서양 부분에 있는 아이슬란드가 소련제 무기를 구입하려고 하며 소련과의 동맹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심지어 여기에 소련이 폭격기와 잠수함 기지를 설치할 가능성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슬란드에 소련의 군사기지가 설치된다면? [[소련군]]이 육지와 해상에서 서유럽을 동시에 압박할 수도 있는 여건도 갖추어지므로, '''사실상 북대서양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시즌2를 시전할 가능성이 있다.''' 먼저 폭격기의 경우 아이슬란드에 공군기지가 생기면 [[이지스 시스템|이지스]]함도 없던 1970년대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모함 전단조차 소련 폭격기 편대가 수십 발씩 날려대는 대함미사일 세례를 버텨낼 수 없었다. [[Tu-95]]나 당시 새로 배치된 [[Tu-22M]] 같은 폭격기 수십대가 [[KH-22]] 부랴 같은 사거리 600km가 넘는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발사하면 이지스함도 없던 시절 [[개함방공]]이 고작이던 당시 호위함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미 해군이 기를 쓰고 이지스함을 만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지스함은 동시에 수십 기의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 전단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핵 공격 등 특이상황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도 오직 냉전 시절 소련군 폭격기들의 미사일 뿐이었다. 소련군 시절에 비해 규모가 크게 감소된 러시아 공군/해군항공대의 대함 전력이 아직도 미국 항모전단에게 매우 큰 위협으로 꼽힐 정도. 호위함이 없어지면 폭격기와 잠수함 앞에 놓인 보급함, 상륙함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아이슬란드에 소련 공군기지가 생기면 미국 입장에서는 불침 항모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핵을 쏘지 않는 이상 공략이 지옥도가 된다.[* 2차 대전 당시를 예로 들자면 태평양 전투는 일본군이 전체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와 이오지마는 미국조차도 질릴 정도의 출혈이 났는데, 소련이 상대면 태평양의 전투는 따위가 될 것이고 상륙 병력 태반이 상륙하기도 전에 물고기 밥이 될 건 당연지사다. 더욱이 아이슬란드의 지형은 산과 절벽이 주를 이루어서 상륙하기도 까다롭다,] 잠수함도 문제였는데 냉전 당시 미국과 NATO 세력은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영국을 연결하는 [[GIUK 갭|G-I-UK]] 선을 따라 대잠수함 작전선을 설정하고 소련군 잠수함들이 대서양으로 나오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소련의 대양 잠수함인 641급(나토명 폭스트롯급)이나 641Б급(나토명 탱고급)은 항속거리가 잠항 상태로도 20,000km에 달했기 때문에[* 이는 미국 본토까지 왕복하고도 남는 거리이다.] 아이슬란드에 기지를 두지 않아도 [[발트 해]]에서 출항하든 [[백해]]에서 출항하든 북대서양이 충분히 작전반경 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에 붙으면 북대서양 전체를 영향권에 넣을 수 있는 중요한 중간 거점이 생기고, 이는 더 이상 소련군 잠수함이 북해나 백해 등의 소련 본토에서 출격해서 미국 및 NATO의 추적망에 전전긍긍하며 G-I-UK 라인의 대잠수함 작전선을 돌파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미국 및 NATO의 대잠 작전은 엄청나게 어려워진다. 2차 대전 시기의 U보트야 수상 항해가 필수였지만 핵잠수함은 잠항으로도 충분히 공격이 가능하다. 요컨대 아이슬란드가 소련 편에 붙으면 '''북미-유럽간의 북대서양 항로가 완전히 절단나서 소련이 유럽을 침공하는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도 미국에서 유럽으로 통조림 하나도 못 보낸다는 소리고[* 소련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군함을 모조리 해체하고 20년 만에 재건한 나치 독일과 다르게 60년 간 육성한 세계 2위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성기 소련 해군은 적수가 미국밖에 없는, 영국과 프랑스 해군이 힘을 합쳐 싸워도 못 이기는 그런 존재였다.] 그건 3차 대전의 승자가 소련이란 뜻이 된다.''' 결국 NATO의 중재에 따라 아이슬란드 정부는 기한을 1월 24일까지로 기한을 늘려 그 때까지 영국배가 퇴거하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한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결국 이번에도 영국은 아이슬란드 측의 주장--과 NATO의 압박--을 받아들여 군함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24일부터 열린 런던에서의 회담에서 아이슬란드 측은 자국 내 영국 어선의 연간어획량을 4만 톤 이하로 제한할 것을 주장했고, 영국 측은 8만 톤을 주장했다. 어업은 당시 영국 정부의 집권 여당인 [[노동당(영국)|노동당]]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 측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이렇게 교섭이 진행 중인 와중에도 영국 어선들은 아이슬란드 수역에서 계속 조업을 하고 있었다. 1976년 2월 5일 영국의 군함 2척이 다시 아이슬란드 수역에 진입했다. 그리고 2월 18일 영국의 호위함 로스트후트가 아이슬란드 경비정 토르와 충돌사고를 일으켰고 결국 다음날인 2월 19일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과의 모든 외교관계를 단절해버렸다.''' 한편 이 때 [[EC]]에서 유럽 200해리수역 법안을 통과했으며, [[미국 의회]]도 이 법안에 가결했다. 한편 아이슬란드 수역에서는 계속 충돌사고가 일어나 5월 6일에는 HMS 폴모스가 티르를 들이받아 거의 침몰하는 수준의 손상을 입혔고, 5월 12일에는 경비정 에기르가 영국 어선 프라이메라에 대해 포탄 3발을 발사했다. 이런 사태에 발끈한 영국 정부는 마침내 1만 톤급 미사일 [[순양함]]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국제 여론은 배타적 경제수역 200해리가 대세가 되었고, 영국에 대해서는 NATO를 분열시킨다는 비난이 흘러나왔으며, 영국 내부에서도 그깟 대구 따위로 너무 나가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6년 6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한다. 영국은 200해리 내에서 자국 어선은 최대 24척, 연간어획량 5만 톤 이하라는 조건을 내건 아이슬란드 정부의 주장을 승인했다. 그러나 영국 어선 최대 24척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실제로 잡을 수 있는 어획량은 3만 톤이 채 되지도 않았다. 결국 대구 전쟁은 아이슬란드의 완승으로 끝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